제1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제1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1932년에 실시되었으며, 만주 사변에 대한 반대와 정치적 혼란 속에서 치러졌다. 선거는 중선거구제 하에 25세 이상 남성에게만 투표권이 주어졌으며, 우익 세력의 암살 사건이 발생하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진행되었다. 선거 결과, 이누카이 쓰요시 총재의 입헌정우회가 301석을 얻어 압승했으며, 와카츠키 레이지로 총재의 입헌민정당은 146석을 얻었다. 선거 이후 여러 차례 보궐선거가 실시되었으며, 입헌정우회는 전국적인 지지를 확보하며 일본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지지를 보여주었다.
1931년 일본 군부가 조작한 만주 사변 발발 이후 일본 정계는 격변기를 맞았다. 당시 집권당 입헌민정당은 만주 사변에 반대 입장을 취했으나, 군부와의 갈등과 "심각한 부패" 혐의 등으로 비판받으며 와카츠키 레이지로 내각이 총사퇴했다. 이후 야당인 입헌정우회가 중심이 되어 이누카이 쓰요시를 총리로 하는 새 내각이 1931년 12월 13일 출범했다.
선거 제도는 중선거구제를 채택하였으며, 보통선거가 시행되었다. 다만, 선거권은 만 25세 이상의 남성에게만 부여되어 모든 성인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당시 유권자 수는 13,237,841명이었으며, 선출된 총 의원 정수는 466명이었다.
(내용 없음)
1931년 12월 13일 출범한 이누카이 쓰요시 내각은 입헌정우회가 174석으로 소수 여당인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만주 사변 처리가 일단락된 후, 정부는 사변 처리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얻고 정권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제60회 중의원 개회 시 해산을 단행하고 총선거를 실시했다.
2. 배경
그러나 이누카이 내각 출범 당시 여당인 정우회 의석은 174석에 불과하여 소수 여당의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이에 이누카이 내각은 만주 사변 처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국민적 관심이 높아진 시점을 이용하여 정권 기반을 강화하고자, 제60회 중의원 개회 직후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거 실시를 결정했다.
이번 선거는 여러 요인이 집권 여당인 정우회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선거 직전 경쟁 상대인 입헌민정당 내에서 아다치 겐조 등 일부 세력이 탈당하며 당이 분열된 점, 이누카이 내각이 1931년 12월 단행한 금 수출 재금지 조치로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조성된 점, 그리고 만주 사변과 상하이 사변에서의 군사적 성공 소식 등이 여당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또한 정우회는 선거 운동 과정에서 레코드나 토키영화 같은 새로운 미디어를 활용하는 전술을 선보이기도 했다.
만주 사변은 일본의 대륙 침략 야욕을 명백히 드러낸 사건으로, 이는 일제강점기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하고 민족말살통치로 이어지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선거를 전후하여 정치적 폭력이 잇따르면서 일본 정당 정치의 위기가 심화되었고, 군부의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2. 1. 정치적 혼란
1931년, 당시 집권당이었던 입헌민정당은 일본 군부가 일으킨 만주 사변에 대해 반대 입장을 취했다. 시데하라 기주로 외무대신과 와카츠키 레이지로 총리는 군국주의 세력으로부터 군사 문제 개입과 "심각한 부패" 혐의 등으로 비판을 받았고, 결국 와카츠키 내각은 총사퇴했다. 이후, 민정당 내 일부 우익 성향 의원들이 야당인 입헌정우회와 손을 잡고 이누카이 쓰요시를 총리로 추대하며 새로운 내각이 출범했다.
1931년 12월 13일 출범한 이누카이 내각은 당시 여당인 입헌정우회 의석수가 174석에 불과하여 소수 여당으로 정권을 운영해야 하는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이에 이누카이 내각은 만주 사변 처리가 일단락된 후, 사변 처리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등에 업고 정권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제60회 중의원 개회 직후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거를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선거를 앞두고 일부 사업가와 후보자들이 우익 세력에 의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선거전 중인 1932년 2월 9일, '''혈맹단 사건'''의 일환으로 전 재무대신이자 민정당의 이노우에 준노스케가 암살되었고, 총선거 직후인 3월 5일에는 미쓰이 재벌의 총수 단 다쿠마마저 암살되면서, 일본 정당 정치의 미래에 암운을 드리웠다.
2. 2. 경제 상황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일본 경제는 심각한 불황에 직면해 있었다. 이누카이 내각은 금본위제 이탈을 의미하는 금 수출 재금지 조치를 통해 경제 회복을 시도했고, 이는 엔화 가치 하락과 수출 증대로 이어져 일시적인 호황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 정책은 일본 경제의 군수산업 의존도를 높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결국 만주사변 이후 본격화된 군비 확장과 맞물려, 일제강점기 한국을 비롯한 식민지에 대한 경제적 수탈을 더욱 심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3. 선거 제도
4. 선거 운동
5. 선거 결과
선거는 여당인 입헌정우회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선거 전 입헌민정당에서 아다치 겐조 일파가 탈당하여 분열된 점, 이누카이 내각이 1931년 12월 단행한 금 수출 금지 조치 이후 경기가 회복될 조짐을 보인 점, 그리고 만주 사변과 상하이 사변에서의 전승 분위기 등이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이번 선거에서는 레코드나 유성 영화 등 새로운 미디어를 활용한 선거 운동이 시도되기도 했다.
선거 결과, 입헌정우회는 예상을 뛰어넘는 301석을 획득하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2] 반면, 경제 위기 대처 실패 등으로 지지를 잃은 입헌민정당은 기존 의석에서 100석 이상 감소한 146석을 얻는 데 그쳐 참패했으며, 당세 위축을 피하지 못했다. 사회민중당은 3석, 사회대중당은 2석, 혁신당은 2석을 각각 확보했고, 무소속은 12석을 차지했다.
그러나 선거 과정에서 2월 9일 전 재무대신이자 민정당 소속이었던 이노우에 준노스케가 암살되고, 총선거 후인 3월 5일에는 미쓰이 재벌 총수 단 타쿠마가 암살되는 '''혈맹단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정당 정치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또한 입헌정우회는 압승에도 불구하고 선거 후 나카하시 도쿠고로 내무대신의 사임을 계기로 당내 갈등이 표출되었고,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이누카이 총리의 정권 장악력은 오히려 약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5. 1. 정당별 득표율
wikitext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
입헌정우회 | 5,683,137 | 58.2% |
입헌민정당 | 3,442,326 | 35.25% |
사회대중당 | 127,459 | 1.31% |
사회민중당 | 125,758 | 1.29% |
혁신구락부 | 36,839 | 0.38% |
기타 | 1,445 | 0.01% |
무소속 | 347,668 | 3.56% |
총합 | 9,764,632 | 100% |
5. 2. 정당별 의석 분포
간사장: 구하라 후사노스케간사장: 나가이 류타로
서기장: 가타야마 테츠